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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가르침은 우리 곁에 살아있다. 덧글 0 | 조회 357 | 2017-12-09 00:00:00
관리자  

 

     지현 스님 태고종 경남종무원장

 

법문 제목> : 부처님의 가르침은 우리 곁에 살아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에는 다양한 종교들이 여러 지역의 역사와 전통을 함께하는 민족들에 의하여 생성되어 여러 형태로 신봉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많은 종교인들이 무엇을 위하여 종교를 믿는 것일까요? 이러한 질문에는 듣는 사람의 숫자만큼 다양한 대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천국에 가기 위하여 종교를 믿는다고 할 것이며, 어떤 사람은 부처가 되거나, 극락에 왕생하기 위해서 믿는다고 말하기도 할 것입니다. 또한 마음의 평안을 위하여, 병의 고통을 벗어나기 위하여, 가난을 물리치기 위하여 종교를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대답은 다 받아들일 수 있으나, 좀 더 보편적으로 생각하면 행복을 위해서 종교를 믿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누구나 원하는 행복이란 어떤 조건이 충족되어야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돈이 많은 부자나, 지위가 높은 장관이나, 남의 인기를 한 몸에 받는 유명 연예인이나, 회사를 운영하는 사장이나, 훌륭한 배우자를 만난 사람이나, 좋은 자식을 둔 부모들도 대체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 깊은 안목으로 생각하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이런 조건을 충족하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사람마다 각각 그 지은 인연이 다르기 때문에, 모두가 다 같이 행복을 누리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주변에 잘 사는 사람들도 있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산과 들에 자라는 풀과 나무들은 수많은 종류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자라고 있습니다. 말없는 모든 꽃들은 우리들에게 갖가지 아름다움을 느끼게 합니다. 이 세상 우주의 모든 사물들, 곧 삼라만상은 천차만별의 차이를 드러내면서 각각 자기의 속성대로 생성되고 존재하며 변화하는 이런 이치를, 부처님께서는 연기법이라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설산에서 6년 동안 고행하시면서 깨달은 진리가 바로 <연기법>이라 하셨습니다. 연기법을 좀 더 쉽게 말씀드리면,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 조건[因緣]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며, 인연이 다하여 구성 조건들이 소멸하면 그 존재는 사라진다는 진리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고, 모양을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은 끊임없이 변하는 진리를 불교에서는 무상(無常)이라 합니다. 초기 불교에서 무상이라 일컫던 말이 세월이 흘러 불교사상이 보다 발전한 대승불교에서는, 한 차원 높여 공()이라 불리게 됩니다. 우리가 법회 때 늘 암송하는 반야심경은, 삼라만상의 공()한 이치를 설파하는 경입니다. <색불이공 공불이색>의 진리대로 형성된 사물의 무상한 이치를 참으로 철저하게 깨달으면, 반야의 지혜가 드러난다는 가르침입니다. 반야의 지혜라는 말은, 곧 공의 이치를 스스로 터득한 이후에 얻을 수 있는 지혜라 할 수 있습니다.


  불교의 수행법이 여러 가지 있지만, 우선 자기에게 맞는 수행법, 자기가 체험해보고, 해 볼만하다고 느끼는 수행을 한두 가지 택하여 언제 어디서나 꾸준히 지속해 나가면 반드시 각자의 마음에 느껴지는 작은 기쁨을 체험하게 됩니다. 불자들이 쉽게 실천할 수 있는 수행을 몇 가지 들어보면, 염불 · 절하기 · 경전읽기(간경) · 다라니 지송 · 참회기도 · 참선 · 사경 · 봉사활동 · 육바라밀 실천(보살행) · 법회 참석 등이 있습니다.


  불자라고 하여 일상생활에서 특별히 다르게 살 필요는 없습니다. 가정 살림을 하거나 직장 생활을 하거나, 자영업을 운영하더라도 그 생활에 최선을 다하여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부합하는 삶입니다. 다만 틈나는 대로 자기와 인연 맺은 절에 가서 법회에 참석하여 법문도 듣고, 절을 하든지 염불을 하든지, 다라니를 지송하든지, 경전을 읽든지 원하는 방법을 택하여, 부지런히 마음을 닦아가는 실천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절을 자주 찾는 일은 부처님을 찾아뵙고 인사를 올리는 정성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법화경에는 부처님이 방편으로 열반을 나투어 보였지만, 여래의 법신은 이 사바세계에 상주하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예불을 올릴 때, <상주일체 불타야중>이라는 구절은, 지금 우리 앞에 오셔서 우리를 보고 계시는 모든 부처님께 예불을 드린다는 표현입니다. 예불을 올릴 때, 법당에 부처님이 실지로 계신다고 믿고 절을 올리는 불자라야 진정한 불자라 할 것입니다. 더 높은 근원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예불을 올리는 불자와 그 예불을 받으시는 부처님의 법신이 둘이 아니고, 서로 상통하는 진여심은 차별이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불교 최고의 경전으로 일컫는 화엄경에는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다(心佛 及衆生 是三無差別)’고 명백히 밝히셨습니다.

 

  불교에서 무엇보다 소중히 다루는 마음에 대하여 중국의 역대 조사스님들 중에서 마조 선사의 이야기는 우리 불자들이 마음에 새겨야 할 교훈을 생동감 있게 전해줍니다.


  마조 도일(馬祖 道一 ; 서기 709 788) 선사는 중국 선종의 역사상 육조 혜능 선사 다음으로 유명한 선승이었습니다. 중국 선사들 중에서 스님의 속성인 마씨(馬氏)에 조사(祖師)의 칭호를 붙여 이름 부른 스님은 마조(馬祖) 선사밖에 없습니다. 옛날에 서양 역사에서 발달한 로마가 있다면, 동양에는 당나라가 있다고 할 정도로 광대한 국토와 찬란한 문화를 빛냈던 당나라 시대에, 기라성 같은 의 거장들이 마음껏 빛을 발했던 역사는, 불교사에서 가장 왕성했던 대승불교의 황금기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사천성(四川省) 성도 출신인 스님은 어릴 대부터 가까운 절을 드나들다가, 열 두 살 되던 해에 고향의 나한사로 출가하였습니다. 그 후에 사천성 유주의 율사에게 구족계를 받고, 익주의 장송산(長松山)과 호북성 형남의 명월산(明月山)에서 수행했습니다. 남악산(南嶽山)에 육조 혜능선사의 제자인 회양(懷讓)선사가 반야사에서 수행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서 거기서 참선을 익히기 시작하였습니다. 회양선사는 젊은 마조를 만나자 직감적으로 그가 큰 그릇임을 알아차렸습니다. 하루는 반야사 선방에서 열심히 참선을 하고 있는 마조에게 스승 회양 선사가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참선을 하여 무엇을 얻으려 하는가?”

  “부처가 되고자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스승은 벽돌을 하나 들고 와서 숫돌에 대고 갈기 시작하였습니다. 스승의 하는 행동에 어리둥절하던 제자는 호기심으로 여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 하려고 가는 것입니까?”

  “이것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 작정이야.”

  깜짝 놀란 제자 마조가 궁금하여 물었습니다.


  "벽돌을 갈아 어찌 거울을 만들 수 있습니까?”

  “벽돌을 갈아 거울을 만들 수 없다면, 너는 어찌 좌선으로 부처가 되려하느냐?”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스승 회양 선사가 되물었습니다.

  “우마차(牛馬車)의 예를 들어보자. 우마차가 움직이지 않으면 너는 수레를 때리겠느냐?

소나 말을 때리겠느냐? 이에 마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스승은 계속 말하였습니다.


  “너는 참선을 하려고 하느냐? 아니면 앉은 부처가 되려고 하느냐? 만약 참선 공부를 하려 한다면, 좌선(坐禪)이란 앉거나 눕는 행위에 참뜻이 있는 것이 아니며, 만일 좌불(坐佛)이 되려 한다면 부처란 정해진 형태에 구애받지 않는다. 진리란 한곳에 머물지 않는 것이니, 우리가 법을 구할 때에는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네가 만일 좌불이 되려 한다면 부처를 죽이는 것과 같고, 만일 앉은 형태에 집착한다면 영원히 큰 도를 이루지 못할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마조의 마음은 걸림 없이 상쾌하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스승에게 절을 올리고 난 뒤에 다시 물었습니다.


  "마음을 어떻게 써야 형상 없는 삼매경에 도달할 수 있습니까?”

  “네가 마음의 지혜를 갈고 닦는 것은 마치 씨를 뿌리는 것과 같고, 내가 법의 원리를 설명하는 것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같다. 다행이 나의 가르침을 소화할 수 있다면, 너는 도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나의 게송을 들어 보아라

 

  心地含諸種 마음의 밭에는 온갖 씨앗을 머금고 있으니

  雨澤悉皆萌 비가 흠뻑 내리면 모두 싹이 트리라

  三昧華無相 삼매[깨달음]의 꽃은 형상이 없으니

  何壞復何成 어찌 허물어지고 또한 어찌 이루어짐이 있겠는가.